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 (문단 편집) == 평가 == 유독 국내에서 저평가 되는 나치 독일의 원수인데 미국 밀리터리나 군사학 서적 등에서는 유능한 공군 지휘관으로의 면모가 부각되는 편이다. 다만 국내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인지도가 낮아서 그냥 소이탄을 광적으로 사랑한 공군 장군 또는 붉은 남작의 사촌 정도로 알려져 있다. 국내에서는 독일 공군 장군들보다는 에이스들이 주목받는 경향이 있고 장군들의 경우 괴링, 갈란트, 케셀링 정도를 제외하면 인지도가 낮은 편이다. 전차 에이스보다 장군들이 주목받는 독일 육군과는 대조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리히트호펜은 1차대전 이후 하노버 공과 대학에서 항공 공학을 전공했으며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1933년 루프트바페에 합류하고 항공기 개발 부서에서 복무했다. 중형 폭격기를 지지했으며 급강하 폭격엔 부정적이였으나 이런 견해는 콘도르 군단에서 복무하며 변화한다, 리히트호펜의 군 지휘 경력은 스페인 내전에서 콘도르 군단에서 복무하며 시작한다. 그는 국민파를 지원하는 지상 공격을 지휘했고 게르니카 폭격을 수행하였다. 이런 작전 속에서 리히텐호펜은 지상-공중 통신을 발전시키고 근접항공지원의 필요성과 급강하 폭격기의 유용함을 깨달았으며, 지상 지원에 대해 연구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험은 리히트호펜을 루프트바페에서 [[근접항공지원]]의 최고 전문가로 만들어 주었다. 그 외에도 V-1과 V-2의 개발을 승인하고 이러한 승인은 독일의 제트 엔진 개발로 이어졌다. 그가 했다는 말로 유명한 "소이탄에 의해 불타는 도시와 적들을 보면 멋지고 기분이 좋다"는 국내에서 주로 도는 말이다. 다만 흑해 근처에서 투하한 집속탄[* SD-2. 나비폭탄이라는 별명을 가졌으며 처음으로 대량 사용된 집속탄으로 평가된다.]이 소련군에게 괴멸적인 피해를 냈다는 소식에 '훌륭한 광경'이라며 기뻐했다는 일화가 있다. 국내에서 흔히 평가되는 소이탄 성애자에 가려져 국내에선 묻힌,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의 진짜 전쟁 범죄는 다름이 아닌 동부 전선에서의 포로와 민간인에 대한 학살과 학대에 관여했다는 의혹이다. 제대로 조사되기 전에 뇌종양으로 사망하며 의혹으로 끝났으나 파리의 구원자라 불리는 [[디트리히 폰 콜티츠]]도 동부전선에서 유대인 학살 의혹이 있는 만큼 국방군과 친위대에서 동부전선의 전쟁 범죄 행위에 관여하지 않은 지휘관은 극소수에 달한다는 걸 생각하면 그가 동부전선에서의 행위에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폴란드 침공 당시 바르샤바에는 약 12만 명의 폴란드 군이 주둔하고 있었기에 폭격 자체는 헤이그 조약[* 제25조 방어되지 않은 도시, 촌락, 주택 또는 건물에 대한 공격 또는 포격은 금지된다.]에 위배되지 않았으나, 여기서도 민간인들에게 기총소사를 하고 병원 마크가 달린 건물에도 폭격하였다. 즉 폭격 자체는 전쟁범죄가 아니었지만 폭격 중에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그리고 게르니카와 비엘룬, 프람폴[* 9월 13일에 폭격을 당한 폴란드 도시. 당시 폭격으로 주민의 절반이 죽거나 부상당했다. 아직까지도 프람폴의 인구는 전전의 40%도 회복하지 못했다.] 폭격은 아예 비무장한 도시에 민간인을 대상으로 폭격했기에 명백한 전쟁 범죄다.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하였을 때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은 어느정도 독일판 [[커티스 르메이]]라 볼 수 있다. 자신의 분야에서 유능했으며 새로운 전술을 개발하였고[* 커티스 르메이는 폭격기 전술을 리히트호펜은 CAS 전술을 연구하였다.] 도시에 대한 소이탄 폭격으로 적국에 큰 타격을 입힌 전과가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리히트호펜은 전쟁 범죄 행위가 확실하다는 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